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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EBS 다큐프라임 리뷰_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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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국가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어떤 산업이든 어느 정도의 윤리적 틀이 필요합니다.

금융은 특히 더 그렇습니다.

금융계의 도덕성 결여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금융자본주의 세상은 탐욕, 실업, 빈부격차 불평등으로

가득하고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

독일의 항복으로 세계 1차대전이 끝나고 승리한 나라들은

파리에 모여 베르사유 조약을 발표합니다.

전쟁에서 패배한 독일에게 무려 240억 파운드의 전쟁보상금을 지급할 것을 결정합니다.

그 현장에 있던 케인스는 경제위기를 예감하고 영국재무성에 사표를 던졌습니다.

그리고 2달 뒤에 작은 책자 한 권으로 스타가 되었습니다.

그는 평화에의 경제적 귀결을 통해 만약 고의적으로 중부 유럽을

빈곤에 빠뜨리려 한다면 복수는 손쉽고 신속하게 이루어질 것임을 나는 감히 예언한다.

자유방임의 자본주의는 19148월에 끝났다.’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예언이 사실로 밝혀지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독일은 감당할 수 없는 배상금 때문에 더 많은 돈을 찍어낼 수밖에 없었고

결국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미국은 호황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끝없는 욕심은 거품을 만들어냈고

결국 19291029일 거품이 꺼지면서 미국 대공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1931년 유럽의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파시즘이 지지를 얻기 시작했고

빈곤과 실업과 혼란에 지쳐 히틀러에게 정권을 맡겨버리고 말았습니다.

케인스는 이때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를 구하기 위해 위기의 원인에 대한

명쾌한 분석과 해결방법을 담은 책을 출간합니다.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 이론-1936)

케인스는 공황의 원인을 수요부족으로 주장했습니다.

소득이 늘어나도 수요가 똑같이 늘지는 않으며

현실적인 수요량을 유효수요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경기가 잘 돌아가려면 소득과 수요가 거의 같아야 하는데

덜 쓰다보니 경기가 침체되는 것이라고 분석하였습니다.

자본주의 경제체계에서는 그 주체를 가계, 기업, 정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미시경제학에서는 가계와 기업의 의사결정과 시장에서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아담 스미스의 자유시장체제 이후 세계를 지배한 학문입니다.

미시경제학에서 국가는 그저 전쟁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정도의

역할만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거시경제학은 국민소득, 이자율, 환율 등 국가 전체와

세계에 관한 경제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이고 

정부의 계획적인 정책으로 가계와 기업을 움직여야 함으로 정부의 역할을 중요시합니다.

 

케인스가 재무성에서 일할 때는 세계대전 중이었기 때문에

경기 전체, 즉 거시경제를 생각해야 했습니다.

케인스는 공황에서 벗어나는 길은 정부가 재정지출을 확대하여

일자리를 만들고 완전고용이 이루어지면

유효수요가 늘어나서 경제가 회복될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내린 정부의 계획적인 개입이라는 처방은

이제까지 세상을 지배했던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반역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닌지 의심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케인스는 자본주의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좋은 수준의 고용률과

더 평등한 사회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1933년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뉴딜정책을 발표하였습니다.

실업자와 굶주린 사람을 위한 복지정책을 마련하고

댐 건설, 고속도로 건설 등을 통해 일자리를 만들고 전례 없던 강력한 규제를 시행하였습니다.

그리고 1939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사이 케인스의 영향력을 전세계로 커졌고 1945815일에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자

케인스는 세계 최고의 경제학자 자격으로 19447월 브레튼우즈 협정을 진두지휘하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전쟁은 독일과 미국 모두에게 불황의 탈출구가 되어줍니다.

전쟁을 위해 빚을 내고 돈을 쏟아붓자 실업률이 낮아지고 경제가 살아났습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자 케인스주의는 자본주의세계 모든 정보를 지배하는 경제원리가 되었습니다.

이후 케인스이론은 큰 정부를 만드는데 이론적 토대가 되었고

30년 동안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게 해주었습니다.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

런던대학교의 교수였던 하이에크는 케이즈가 승승장구하던 시절

공황의 원인과 극복 방법에 대하여 정반대의 생각을 가졌습니다.

1944년 자신의 주장을 담은 노예의 길을 출간합니다.

하이에크는 너무 많은 투자와 소비로 공황이 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시장의 조정 능력을 신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정부가 경제에 너무 많이 개입하면 정부는 점점 커지고

경제를 비능률적으로 만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케인스주의로 호황을 누리고 있던 세계는 하이에크 주장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자 위기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찾아옵니다.

바로 경기불황과 인플레이션이 같이 오는 스테그플레이션이 오게 된 것입니다.

그로 인해 대세는 케인스에서 하이에크로 기울게 됩니다.

영국은 1979년 경제가 침체에 빠지자 영국 국민들은 보수당 마가릿대처를 선택합니다.

그녀는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에 기반을 둔 대처리즘을 표방하였습니다.

하이에크는 큰 정부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아담 스미스의 자유시장경제체제를 부활시켰습니다.

그로써 신자유주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미국도 19792차 오일쇼크로 경제침제가 계속되자

미국 국민들은 대처와 같은 노선의 레이건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켰고

레이건 대통령은 레이거노믹스를 발표합니다.

레이거노믹스는 건실한 금융, 규제철폐, 적절한 세율, 제한적인 정부지출 등이 주요 내용입니다.

하지만 체제를 한순간에 바꾸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그 이후로도 경기침체는 3년간 계속되었습니다.

 

그 시기 영국은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켰고 승리했습니다.

그 덕분에 당장 성과가 나지 않았던 정책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경제가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공산주의 세계는 소련이 리더십을 잃어가면서 경제위기 해결책이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시장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경제 사정으로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었습니다.

공산주의의 몰락으로 자본주의가 승리함에 따라 대처의 영향력은 막강해졌고

그와 함께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는 지구촌 경제를 휩쓸게 됩니다.

미국과 영국은 세계화를 주장하며 세계 여러 나라에 시장개방의 압력을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세계는 글로벌 경제체제에 돌입하게 됩니다.

 

글로벌 경제체제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경제활동이 자유로워지고

경제적 상호의존도가 높아지는 경제체계입니다.

또 금융산업을 무기로 세계화에 성공한 미국과 영국은

금융자본이 경제를 지배하는 금융 자본주의를 탄생시켰습니다.

하지만 금융 자본주의가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예측한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1994년 멕시코 금융위기는 미국의 지원으로 넘어갔지만

1997년 태국 금융위기는 주변국으로 퍼져나가며 우리나라 또한 금융위기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2008년 철옹성이라고 생각했던 미국까지 경제위기를 겪었고

2010년에는 유렵에서 금융위기가 있었습니다.

이제 세계는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세계가 되었고

세계화는 전례 없는 풍요와 함께 부와 빈곤의 양극화가 가속되고 불평등이 더 커졌습니다.

 

케인스 주의자들은 금융위기의 원인이 신자유주의가 괴물 금융을 키웠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케인스는 금융이 위험하다고 생각했고 금융의 파괴력을 의심했습니다.

하이에크 주의자들은 자유시장이 아닌 정부의 과도한 지출이 금융위기의 원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본주의가 고장났다고 진단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200년 전 산업혁명 이후 안정적으로 생활하는 인구를 급증시켰고

상당수의 사람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했다고 합니다.

자본주의가 고장 난 원인을 분석하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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